<오늘의 역사>발해와 당나라의 전쟁 동북아시아 패권을 둔 역사적 진실

1. 발해와 당나라, 갈등의 서막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발해 중국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이 세운 국가로, 건국 초기부터 중국 당나라와 복잡하고 긴장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신생국 발해의 급격한 성장을 끊임없이 견제했으며, 이는 결국 양국 간의 대규모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1. 고구려 유민의 건국과 당나라의 견제

발해는 698년 고구려 출신 대조영과 말갈족이 굳건하게 연합하여 동모산 일대에서 건국했습니다. [사료확인요망] 당시 당나라는 요동 및 만주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발해의 웅장한 등장은 이러한 당나라의 동북아 팽창 전략에 큰 위협이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초기에 발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했으나, 발해의 영토가 넓어지고 국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무력 진압을 포기하고 외교적 회유책을 시도하게 됩니다. 결국 당나라는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며 관계 정상화를 꾀했지만, 이는 겉치레에 불과했을 뿐 물밑에서는 끊임없는 이간질과 견제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거란, 흑수말갈, 그리고 남쪽의 신라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발해를 사방에서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주변국의 압박은 발해 조정 내부에서도 향후 대외 정책을 두고 친당파와 반당파의 극심한 갈등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건국 초기의 혼란스러운 동북아시아 정세를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 흑수말갈 문제와 얽힌 외교적 대립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양국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흑수말갈’ 문제였습니다. 발해의 북쪽 변방에 위치한 흑수말갈은 본래 발해의 강력한 통제와 영향권 아래 있었으나, 당나라가 이들과 비밀리에 통교를 맺고 그곳에 흑수주를 설치하는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발해를 남북으로 포위하여 압박하려는 당나라의 노골적이고 치밀한 적대 행위였습니다. 당시 발해의 2대 왕이었던 무왕(대무예)은 이 사건을 자국의 존립을 뿌리째 위협하는 심각한 안보 위기로 간주하고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습니다.

무왕은 동생 대문예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해 당나라와 내통한 흑수말갈을 무력으로 정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친당 성향을 보이던 대문예가 출병을 주저하다 결국 당나라로 망명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발해와 당나라 양국의 갈등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발해가 당나라와 전면전을 결심하게 된 핵심 외교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밀착으로 인한 발해의 지정학적 포위 위기
  • 주변국을 이용한 발해 내정 간섭 및 철저한 고립화 정책 시도
  •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 수용 및 무왕의 범죄자 송환 요구 공식 거절

1. 갈등의 시작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척박한 땅에 세운 발해. 당나라는 끊임없는 견제와 압박으로 신생 제국의 목을 조여왔습니다.

2. 흑수말갈의 배신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비밀 연합. 이는 발해를 남북으로 포위하려는 노골적이고 위험한 외교적 도발이었습니다.

3. 무왕의 군사적 결단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당나라에 대한 파격적인 선제 타격을 결심합니다.

4. 장문휴 수군의 맹활약

732년, 장문휴 장군이 이끄는 발해 막강한 수군은 거친 바다를 건너 당나라 핵심 항구인 산둥반도 등주를 완전히 궤멸시킵니다.

5. 마두산 전투의 대승

해전뿐만 아니라 육전에서도 맹활약한 발해군. 요서 일대의 마두산에서 당나라 대군을 격파하며 동북아 패권을 과시합니다.

6. 해동성국의 탄생

무력 충돌 이후 지혜로운 평화 교류 시대로의 전환. 발해는 전쟁의 승리를 넘어 눈부신 문화를 꽃피운 ‘해동성국’으로 거듭납니다.

2. 발해 무왕의 결단과 등주 선제공격

당나라의 전방위적인 외교적 압박과 봉쇄가 거세지자 발해 무왕은 가만히 고사당할 수만은 없다는 단호한 판단을 내립니다. 그는 오랫동안 훈련시켜 온 강력한 발해 군사력을 바탕으로, 방어에만 치중하지 않고 오히려 적의 허를 날카롭게 찌르는 선제 타격을 치밀하게 계획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대제국 당나라를 상대로 한 유례없는 군사적 도발이자 엄청난 결단이었습니다.

2.1. 장문휴의 수군 창설과 산둥반도 타격

732년 가을, 무왕은 명장 장문휴를 수군 사령관으로 전격 임명하여 당나라 해군의 핵심 전력이 주둔하고 있는 산둥반도의 등주(현 펑라이 일대)를 선제 공격하도록 군사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우수한 조선 기술과 항해술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었기에, 단기간에 강력한 대양 해군을 편성하여 발해만을 횡단하는 기습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수군의 맹렬한 등주 공격은 당나라 조정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료확인요망] 방어선 후방이라 여기고 방심하고 있던 당나라 수군은 발해군의 기습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등주 자사 위준이 현장에서 전사하는 등 당나라 군대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 작전은 발해의 막강한 해상 장악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해상 작전의 성공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를 넘어 당나라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다는 심리적 공포를 심어주었으며, 국제 사회에서 발해가 결코 얕볼 수 없는 강대국임을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2.2. 당나라의 반격과 발해의 성공적인 방어 전략

핵심 항구인 등주가 발해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자, 당나라 현종은 극도로 분노하여 즉각적인 대규모 반격 작전에 나섰습니다. 현종은 발해를 배신하고 망명했던 대문예를 유주 일대의 병력과 함께 파견하여 발해의 서쪽 국경을 압박하는 한편,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참전을 독려했습니다.

당나라는 남쪽의 신라 성덕왕에게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도록 종용함으로써, 발해의 병력을 양분시키려는 고도의 양동 작전을 구사했습니다. 신라군은 실제로 733년 한겨울에 발해의 남쪽 국경으로 군대를 출진시켰으나, 예상치 못한 폭설과 매서운 추위 등 악천후를 만나 군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큰 성과 없이 회군해야만 했습니다.

발해는 험준한 지형과 혹독한 기후 조건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탁월한 방어 전술을 펼쳤습니다. 무왕의 지휘 아래 발해군은 국경의 요충지를 굳건히 방어하며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을 완벽하게 무력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발해의 국토를 안전하게 수호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3. 마두산 전투와 발해의 영토 확장

발해의 공세는 단 한 번의 해상 기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나라의 협공을 무사히 이겨낸 발해 무왕은 기세를 몰아 육상에서도 적극적인 군사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요하를 거침없이 넘어 요서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며 당나라 대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습니다.

3.1. 요서 지역 진출과 마두산에서의 승리

가장 대표적인 육상 전투는 바로 마두산 전투입니다. 발해군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 부근에 위치한 요충지 마두산(현재의 허베이성 친황다오 인근) 부근에서 당나라 군대와 대규모 회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발해의 거침없는 진격을 막기 위해 길목에 돌로 장애물을 쌓고 맹렬히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발해군은 굴하지 않고 400리에 걸친 당나라의 장애물을 돌파하며 마두산 일대를 장악하는 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놀라운 승리는 발해가 단순한 수동적인 방어국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영토를 팽창하고 적진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무서운 군사적 역량을 갖추었음을 만천하에 증명한 사건입니다.

또한, 이 육상 전투의 연속된 승리를 통해 발해는 만주 지역의 여러 말갈 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되었으며, 군사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흔들림 없는 국정 운영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3.2. 동북아시아 패권 장악과 당나라의 태도 변화

일련의 숨 막히는 전쟁을 거치며 발해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물론 요동 및 요서의 핵심 지역까지 그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대대적으로 확대했습니다. 이는 명실상부하게 동북아시아의 확고한 패권국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했습니다.

당나라는 해상과 육상 모두에서 뼈아픈 타격을 입고, 마침내 무력과 군사적 수단만으로는 발해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결국 당나라는 발해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현실적인 힘의 균형을 인정하며 외교 노선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치열했던 갈등과 전쟁 시기의 주요 역사적 흐름은 아래 표에서 한눈에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연도주요 사건 및 군사 충돌역사적 결과 및 의미
698년대조영의 발해 건국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동모산에서 진국(발해) 선포 및 자립
732년장문휴의 등주 선제공격당나라 수군 전멸 및 자사 위준 전사, 발해의 압도적 해군력 과시
733년당나라와 신라의 협공 방어신라군의 폭설 피해 회군 및 당나라 북부 국경 공격 완전 무력화
733년 이후마두산 전투 및 요서 진출만리장성 동북방 당나라 대군 격파, 영토 확장 및 패권 장악


4. 전쟁 이후의 발해와 중국 관계

수십 년간 지속되었던 치열한 무력 충돌의 시기가 서서히 저물고, 발해의 3대 왕인 문왕(대흠무)이 즉위하면서 양국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왕 시기에 힘을 통해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확실히 보장받았다면, 문왕은 이를 바탕으로 실용적인 외교 노선을 채택하게 됩니다.

4.1. 적대 관계에서 교류와 평화로의 전환

문왕은 전쟁으로 소모된 국가의 내부 체제를 견고하게 정비하고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관계를 소모적인 적대 관계에서 친선과 평화 교류 모드로 과감히 전환했습니다. 상호 간의 사신 파견이 정례화되었고, 무역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며 당나라 장안에 발해 유학생들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결코 국가의 존엄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대흥(大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당당하게 사용하였으며, 스스로를 천자(황제)의 나라로 칭하는 등 자주적인 독립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철저히 유지했습니다. 즉, 굴욕적인 사대가 아닌 대등한 위치에서의 실리주의 외교를 펼친 것입니다.

당나라 역시 과거의 오만했던 태도를 버리고 발해 사신을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며, 양국은 문화와 경제의 황금 교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4.2. 해동성국으로 발전하는 발해의 위상

전쟁의 위협이 사라진 평화 시대의 개막은 발해가 눈부신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탄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바탕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상업 교역로인 ‘발해 5도’를 통해 일본, 신라, 당나라를 잇는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 우뚝 섰습니다.

이러한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9세기 선왕 대에 이르러 발해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상 최대치로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5경 15부 62주라는 완벽한 지방 행정 구역 체제를 완비하며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완성했습니다.

이 시기 당나라는 찬란한 문화와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하는 발해를 향해, 마침내 ‘바다 동쪽의 융성하고 강대한 국가’라는 최고의 찬사인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발해의 영광스러운 결실이었습니다.

5. 결론 및 요약

지금까지 상세히 살펴본 발해와 중국 당나라 간의 전쟁의 역사는 단순한 승패의 과거 기록을 넘어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척 뜻깊고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당시 거대 제국의 부당한 압박에 맞서 싸운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5.1. 발해-중국 전쟁이 남긴 역사적 의의

발해-중국 전쟁이 남긴 가장 중대한 역사적 의의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결코 당나라 중심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체제만은 아니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강대국의 무자비한 팽창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운 역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굳건하게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고 거대한 영토를 지켜낸 발해의 강인한 저력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위대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힘없는 평화가 아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억지력이 평화의 근간임을 알려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외교적 고립의 위기를 무력을 통한 정면 돌파로 이겨내고, 이후 대등한 평화 관계를 이끌어낸 무왕의 탁월한 전략적 선택은 역사 속 훌륭한 지도자의 표본으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5.2. 자주적인 제국 발해의 재조명

안타깝게도 발해의 역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오랜 기간 소외되거나 잊힌 측면이 있습니다. 발해를 단순히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한 유민들의 도피처 정도로 치부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독자적인 연호를 당당히 선포하고, 강력한 군사력과 세련된 문화를 동시에 구축했던 자주적이고 찬란한 제국 발해의 위상을 우리는 반드시 재조명해야 합니다.

동북공정 등 역사 왜곡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발해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핵심입니다. 더 깊고 방대한 역사적 사료 탐구를 원하신다면, 국사편찬위원회 공식 자료를 직접 참조해 보시는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