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온 자리] <장충동>필리핀 원조설의 실체, 장충체육관은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장충동 고개를 넘어갈 때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은빛 돔이 보입니다. . 바로 대한민국 실내 스포츠의 성지이자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함께해온 장충체육관입니다. 서울 중구 장충동이라는 동네는 유독 많은 오해와 진실이 뒤섞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살아온 자리 테마로, 장충체육관을 둘러싼 해묵은 오해를 풀고 장충동이 가진 겹겹의 시간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필리핀이 지어주었다는 ‘오해’의 실체

장충체육관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1960년대 초, 우리보다 잘살았던 필리핀이 원조 차원에서 설계하고 지어준 건물이라는 설입니다. 이는 중장년층 사이에서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고, 과거 일부 언론에서도 인용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지금의 필리핀과 다르게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를 겨우 넘기던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의 경제 대국이었고, 마닐라에는 이미 세계적 규모의 돔 경기장인 ‘아라네타 콜리세움’이 존재했습니다. 당시 우리 기술진이 대형 돔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필리핀의 사례를 참고하고 견학을 다녀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와전되어 “필리핀이 직접 지어주었다”는 도시전설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당시 우리 국민 스스로가 “우리 기술력으로 저런 거대한 지붕을 올렸을 리 없다”고 믿었던 슬픈 자격지심이 낳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진짜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기술자들

장충체육관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설계와 시공으로 완성 되었다고 합니다.

  • 설계: 한국 근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 선생이 맡아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담아냈습니다.
  • 구조: 돔 지붕을 지탱할 기술적 한계를 극복한 것은 최종완 박사와 국내 엔지니어들이었습니다.
  • 시공: 삼환기업이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끈질긴 사투 끝에 완공했습니다.

🥊 대한민국 현대사의 뜨거운 용광로, 장충체육관

1963년 2월 1일 개관한 장충체육관은 단순한 체육 시설을 넘어 한국인의 눈물과 환희가 서린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레슬링과 권투의 성지로서, 국민 영웅 김일 선수의 박치기 한 방에 온 국민이 안방 TV 앞에서 환호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또한 홍수환 선수가 귀국 후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경기를 치른 주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신 시절과 전두환 정부 시절,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던 장소이기도 하여 ‘체육관 대통령’이라는 서글픈 신조어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장충체육관은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역사의 증인입니다.

🌸 장충동(奬忠洞), 충절을 기리는 이름의 무게

체육관이 위치한 장충동이라는 지명 자체에도 깊은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장충’이라는 이름은 장충단(奬忠壇)에서 유래했습니다.

  1. 충절을 기리다: 1900년 고종 황제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이경직, 홍계훈 등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세우고 ‘장충단’이라 명명했습니다.
  2. 아픔의 역사: 일제강점기,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이곳을 공원으로 바꾸고 일본인의 동상을 세우는 등 훼손했습니다.
  3. 현재의 장충동: 지금의 장충단공원은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이준 열사, 강우규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이 세워진 ‘충절의 땅’으로서 그 가치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표] 장충동 및 장충체육관 주요 역사

연도주요 사건의미 및 가치
1900년장충단 건립을미사변 순국 충신들을 기리는 국가 제단
1963년장충체육관 개관국내 최초의 실내 육상 경기장 및 돔 구조물
1970년대김일 레슬링 경기 등국민적 위로와 희망의 스포츠 성지
2015년리모델링 재개관역사적 원형을 보존한 현대적 복합 문화 공간

🍲 족발과 평양냉면, 실향민의 애환이 담긴 맛

장충동 하면 맛있는 족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60년대 장충체육관 경기가 끝난 뒤, 허기진 관중들이 근처 식당으로 몰려들면서 ‘장충동 족발 거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또한 인근의 평양냉면 노포들은 실향민들의 그리움을 달래주던 맛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장충동은 이처럼 숭고한 역사와 서민들의 진솔한 먹거리가 공존하는 독특한 결을 가진 동네입니다.


📮 오늘의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장충동의 돔 지붕은 사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부정의 시선을 이겨내고 “우리 손으로 지어낸” 자부심의 상징입니다. 필리핀 원조라는 오해를 바로잡는 것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우리 선배 세대의 노고를 제대로 인정해 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산의 줄기가 내려오는 장충동 언덕에서, 오늘은 족발 한 접시의 온기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살아온 자리의 단단하고 뜨거운 기록을 앞으로도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장충 체육관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실내종합체육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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