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2탄: 궁녀의 가마에 몸을 싣고, 새벽을 가른 국왕의 필사적 탈출

아관파천,지난 번 우리는 폭풍전야와 같았던 2월 10일의 경복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7시, 칠흑 같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통해 두 대의 가마가 빠져나옵니다. 가마 안에는 누가 타고 있었을까요? 화려한 왕의 복식 대신 궁녀의 옷을 걸치고 숨죽인 한 남자, 바로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기 전 고독한 군주였던 고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날의 긴박했던 ‘새벽 탈출 극’의 전말을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아관파천>

🚪 영추문의 침묵: 왕을 실은 가마는 왜 멈추지 않았나?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과 친일파 훈련대의 감시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는 상황에서 고종이 선택한 전략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 그대로였습니다. 고종은 며칠 전부터 가마 두 대를 준비하여 궁녀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함으로써 경비병들의 주의력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궁녀들이 타는 좁고 초라한 가마에 몸을 구겼습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오늘도 상궁들이 나가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만약 그 순간 가마 문이 열렸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 자리에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는 고종의 손을 들어주었고, 가마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정동(貞洞)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2km, 목숨을 건 레이스

경복궁에서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까지의 거리는 약 2km 남짓. 평소라면 금방 닿을 거리였지만, 가마 안의 고종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였습니다. 일본군 기마병이 뒤쫓아오지는 않을지, 친일 내각의 군대가 앞길을 막지는 않을지 매 순간이 생사의 갈림길이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 해군 육전대 100여 명이 정문을 열고 고종을 맞이했습니다. 드디어 일본의 칼날로부터 벗어난 순간이었습니다. 고종은 공사관 2층에 마련된 좁은 방에 짐을 풀었습니다. 일국의 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이 사건은 국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은 순식간에 러시아로 기울었습니다.

[표] 아관파천 당일(2월 11일) 긴박한 타임라인

시간주요 상황비고
새벽 06:00고종과 왕세자, 궁녀 복장으로 가마 탑승극비 보안 유지
새벽 07:00경복궁 영추문 통과위장 전술 성공
오전 07:30러시아 공사관 도착 및 보호 요청친러 내각 즉시 수립
오전 10:00친일파 ‘을미오적’ 체포령 하사김홍집 내각 붕괴 시작
오후 02:00성난 군중에 의한 김홍집 시해성난 민심의 폭발

⚖️ 3. 생존을 위한 선택인가, 주권의 포기인가?

아관파천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늘날까지도 팽팽하게 엇갈립니다.

  • 비판의 시선: 왕이 백성과 궁궐을 버리고 외세의 품으로 도망친 것은 국가의 자존심을 짓밟은 행위였다는 비판입니다. 실제로 이 기간에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광산 채굴권, 산림 벌채권 등 엄청난 이권을 챙겨갔습니다.
  • 옹호의 시선: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살해된 마당에, 고종이 경복궁에 계속 머물렀다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독주를 막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준비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는 평가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보낸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조선은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고, 민중들은 왕이 없는 경복궁을 보며 나라의 운명을 걱정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 지금도 정동에 남은 그날의 흔적: ‘왕의 길’

오늘날 정동길을 걷다 보면 ‘구 러시아 공사관’의 하얀 탑을 볼 수 있습니다. 화재와 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그 탑 아래에는 여전히 고종이 탈출할 때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통로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왕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화려한 덕수궁 돌담길 옆에 숨겨진 이 좁은 길은, 화려한 역사의 뒷면에 존재했던 비극과 처절한 생존 의지를 상징합니다. 2월 11일의 추위 속에서 고종이 느꼈을 두려움과 결연함은 오늘날 정동의 붉은 벽돌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습니다.


📮 오늘의 페이지를 덮으며: 역사는 반복되는가?

130년 전 오늘, 고종 임금의 가마가 정동으로 향했던 이유는 결국 나라에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을 때, 선택지는 남의 나라 공사관뿐이었습니다. 아관파천은 우리에게 슬프고 뼈아픈 교훈을 남깁니다.

  • 기록의 무게: 가마 속에 숨었던 왕의 고뇌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권의 소중함을 말해줍니다.
  • 공간의 기억: 지금 우리가 걷는 정동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닌, 한 국가의 명운이 걸렸던 레이스의 현장입니다.
  • 사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열쇠입니다.

내일은 또 어떤 역사의 페이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2월 11일의 긴박했던 새벽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우리만의 ‘단단한 자리’를 만들어 봅시다.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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