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천하를 가졌으나 아들은 보지 못한 노인, 1898년 2월 22일 쓸쓸한 퇴장

흥선대원군 오늘은 한 시대를 호령하던 거인흥선 대원군 이하응.

1898년 2월 22일, 조선 말기 파란만장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운현궁에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나라의 섭정으로서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그였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 고종의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었습니다.


1. 운현궁의 적막, 꺾여버린 대원위대감의 기개

운현궁은 대원군에게 영광과 회한이 공존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둘째 아들 명복을 왕(고종)으로 만들었고, 10년 동안 조선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말년의 운현궁은 유배지와 다름없었습니다.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끊임없는 갈등, 그리고 아들 고종과의 정치적 대립은 부자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강으로 인도했습니다.

서거 직전의 대원군은 노환으로 기력이 다해 있었습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운현궁의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올 아들의 행차 소리만을 기다렸습니다.

2. 고종은 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나

첫 번째는 정치적 앙금

  • 대원군은 임오군란과 갑오개혁을 거치며 수차례 고종의 왕위를 위협했습니다.
  • 또한 고종이 추진하는 정책에도 번번이 반대했습니다.
  • 고종에게 아버지는 효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정적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는 명성황후에 대한 부채감

  • 불과 3년 전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 당시 대원군이 일본 세력과 결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 이는 고종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아내를 잃은 남편으로서 고종은 아버지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3. “임금께서 오셨느냐?” 끝없는 기다림의 기록

대원군의 마지막은 애처로웠습니다. 그는 숨이 멎어가는 순간에도 곁을 지키던 손자 이준용에게 아들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상감께서 오셨느냐?”라는 질문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와 다름없었습니다.

궁궐에서는 신하들이 고종에게 문안을 가야 한다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관례적인 조문 사절만을 보냈을 뿐입니다. 결국 대원군은 아들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차가운 시신이 되었습니다. 왕의 아버지인 ‘국태공’의 장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임금이 참석하지 않은 이 이례적인 서거는 당시 백성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4. 서거 이후에야 찾아온 아들의 눈물

아버지가 숨을 거두었다는 확정적인 보고를 받은 후에야 고종은 운현궁을 찾았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거부했으나, 죽은 아버지 앞에서는 통곡했습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헌의(獻懿)’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격식에 맞춰 치렀습니다.

이 눈물은 회한이었을까요, 아니면 안도였을까요? 한 시대의 풍운아였던 대원군의 서거는 단순히 한 노인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제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대원군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조선은 이미 대한제국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고, 그가 막으려 했던 외세의 물결은 이미 궁궐 깊숙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5. 우리가 살아온 자리: 기록이 말하는 부자의 비극

오늘 2월 22일의 기록을 통해 권력의 비정함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대원군 이하응은 천하를 가졌으나 자식의 마음은 얻지 못했습니다. 고종은 제국을 선포했으나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고독한 군주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운현궁의 고요한 뜰을 걸을 때 느껴지는 쓸쓸함은, 아마도 128년 전 오늘 이곳을 가득 채웠던 한 노정객의 허망한 기다림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권력은 짧고 인간의 정은 깊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그 우선순위는 종종 뒤바뀌곤 합니다.

흥선대원군
사진 : 위키백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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