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제국의 심장을 뒤흔든 불멸의 불꽃, 민족의 의열사

김지섭,민족의 의열사 며칠 뒤면 제107주년 3·1절을 맞이합니다.

그에 앞서 오늘 2월 20일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숭고한 기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인 1928년 2월 20일 새벽이었습니다. 일본 지바 형무소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한 사내의 고단했던 숨결이 멈추었습니다.

그는 의열단원 추강 김지섭 의사였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졌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맨몸으로 돌파했던 위대한 기록입니다. 우리 민족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 그의 생애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안동의 선비, 투사가 되어 대륙을 누비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지섭 의사는 본래 법학을 전공한 인텔리였습니다. 그는 판사 서기 등으로 근무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는 안락한 삶을 보장하던 법전 대신 폭탄을 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그곳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동지들을 규합하며 제국의 심장부를 타격할 기회를 끊임없이 엿보았습니다. 그에게 이주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필사의 유랑이었습니다.

그는 낯선 타국 땅에서 극심한 배고픔과 추위를 겪었습니다. 모진 고난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조국 광복을 향한 열망은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열단의 강령을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스스로 불꽃이 되었습니다.

1924년 1월 5일, 니주바시에 울려 퍼진 독립의 외침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이 참혹한 만행은 김지섭 의사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일제 권력의 핵심인 제국의회를 폭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 석탄선 밑바닥에 몸을 숨겼습니다. 목숨을 건 일본 밀항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거사 당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회가 휴회 중이라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대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일왕이 거처하는 궁성 입구였습니다. 바로 니주바시(二重橋)였습니다.

그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궁성을 향해 세 발의 폭탄을 던졌습니다. 비록 폭탄이 모두 강력하게 터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일왕의 거처가 직접 공격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전역은 경악했습니다. 이는 일제의 상징적 권위에 가한 가장 직접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치명적인 충격을 안겨준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법정에서 꾸짖은 일제의 만행

체포된 후 이어진 재판 과정에서 김지섭 의사는 투사로서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일본인 판사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침략의 부당함을 날카롭고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 것은 진실로 영광이다.”

그가 외친 법정 진술은 식민지 조선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당시 고통받던 수많은 동포들에게 커다란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는 재판 내내 일본 법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동양 평화의 유일한 길임을 당당히 설파했습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바 형무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단식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옥중에서의 싸움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옥중 편지에 서린 가장의 애환과 민족의 슬픔

김지섭 의사가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오늘날 보물로 지정될 만큼 소중한 역사적 자산입니다. 특히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는 투사의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가 가득합니다. 가장으로서의 미안함과 그리움이 문장마다 절절히 묻어납니다.

그는 면회를 오겠다는 아내를 한사코 말렸습니다. “오지 마시오”라는 짧은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여비가 아까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먼 이국땅 감옥까지 오며 아내가 겪을 고초를 걱정했습니다. 홀로 남겨진 가족의 삶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그의 깊은 사랑과 민족의 아픔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1928년 2월 20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순국 98주기인 오늘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김지섭이라는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는 오직 빼앗긴 들에 봄을 가져오기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가장 춥고 어두운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우리 역사가 증명하는 진정한 민족의 열사였습니다.

그의 옥사는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의 명확한 증거입니다. 이 땅의 평화는 김지섭 의사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유랑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영등포의 공장지대를 걸을 때 그들을 기억합시다. 여의도의 화려한 빌딩 숲에서 잠시 멈춰 봅시다. 그가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조국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의 값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98년 전 오늘 흘린 그의 눈물과 피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자리와 미래

김지섭 의사가 마지막 숨을 내뱉었을 때를 상상해 봅니다. 그가 꿈꾸었던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마 지금처럼 아이들이 밝게 웃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걷는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자리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열사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소중한 결과물입니다.

2월 20일, 겨울 끝자락의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습니다. 그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마음 깊이 기립니다. 그의 불꽃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민족의 별입니다.

오늘을 기억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김지섭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이(가)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김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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